"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신 지 어느새 16년이 흘렀네요.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이른바 '노풍(盧風)'을 취재현장에서 체감했던 저로서는 생전 기억이 더 생생한데요. 청와대 출입기자로 함께 했던 고인의 대통령 재임시절도 마찬가지구요.
여러 기억과 생각이 떠오릅니다. 특히 검찰의 부당한 수사가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했던 현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은 개탄스러워요. 오히려 검찰 권력이 강화돼 내란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점은 올해 대통령 보궐선거의 의미를 역사적 과제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검찰 해체와 법원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수하기를 기대합니다. 지금은 이재명입니다!!!"



"제가 2년전 출간한 책 『아침저널, 박경수입니다』 p93에는 고인에 대한 제 기억과 단상이 남아있습니다.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도 떠오르구요. 아래에 게재합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건 나만이 아니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았던 분이다. 1989년 전두환을 향해 국회의원 명패를 던지고 1990년 3당합당에 맞서고 2002년 이른바‘노풍’을 통해 대권을 잡고 2004년 헌정사상 첫 탄핵을 뒤집고 2009년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까지, 늘 정의의 편에서 서민의 편에서 힘써온 친근한 정치인이다. 영화 <변호인>이 1천만 관객을 넘어선 것도, 여론조사 때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신뢰도를 기록하는 것도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정치인 노무현을 처음 만난 건 지난 2001년 초여름. 여의도의 한 유명 설렁탕집 기자간담회에서였다. 정작 기자들이 별로 나오지않아 서로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해수부장관을 마치고 여의도로 컴백해 민주당 출입기자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조찬인 데다가 당시엔 미미한 지지율이었던 대선후보에 대해 언론의 호응도는 극히 낮았다. 하지만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예상 밖으로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정신에 대한 공감이었던 것 같다. 결국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그 시대정신이 승패를 갈랐다고 판단된다. 기자로서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인 취재 현장이었다. 광주, 대구를 비롯해 고비고비마다 청중을 사로잡은 고인의 연설은 아직도 귀전을 울리는 듯하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2002년 민주당 경선은 훗날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로 재생됐다. 거기에 내 모습도 잠시 등장한다. 고인의 기자회견 뒤로 수첩을 들고 받아적던 낯익은 취재기자. 고인이 언론 국유화 의혹에 대한 이인제 후보 공격에 맞서던 내용으로, 2~3초의 짧은 시간에 내 젊음도 스쳐갔다. 나는 그 영화를 두 번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2004년 11월, 탄핵 논란이 마무리된 뒤 기자 출입처를 청와대로 옮겨 고인을 다시 만났다. 해외순방을 위한 특별기 안에서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내게 던졌던 부산 억양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청와대에 오래 있네요.”청와대 취재에 나선 지 한달밖에 되지않던 내게는 당황스러운 얘기였다. 아마도 나를 익숙하게 느끼셨던 것 같다. 여의도 설렁탕집에서의 어색한 첫 만남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 충남의 한 바닷가 음식점에서 고인의 실종 속보를 접했다. 경제부 부서 MT를 마치고 해장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가슴이 미어졌다.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직감이 다가왔다. 고인이 대통령 재직 당시 애독했던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가 떠올랐다. 한 대목이다.“임금의 칼에 죽기 싫었던 그(이순신 장군)는 오직 자신이 수락하는 방식으로만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길 바랐다.”고인이 검찰의 부당한 수사로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결정되기를 원치않았다고 판단했다. 곧 내 직감은 현실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이순신 장군이 역사속에 국민 영웅으로 남았듯, 고인은 우리 마음에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았다. 그 대통령을 곁에서 취재하며 기사를 쓰며 방송에 담아내며 지냈던 그 시절이 언론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무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