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에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한덕수 대통령 직무대행이 컴백했어요.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했기 때문인데요. 사실 충격이 적지않지요. 이에 앞서 주말을 앞두고는 더 큰 충격이 있었어요. 대통령 경호처 인사 2명이 구속되지 않은거예요. 비화폰 기록 삭제 지시 의혹 등이 있는 인물인데, 사법부 판결의 흐름이 좋지않아요. 하지만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판도라의 상자에도 희망은 남아있었으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법원의 영장 기각...김성훈, 이광우
"저는 토요일 아침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죠. 영장이 기각된 때가 금요일 밤 늦은 시간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당연히 구속될꺼라는 예상이 강했기에 관심이 크지않았어요. 다들 그랬을꺼 같애요. 더군다나 경찰의 신청이 세차례나 반려되다가 서울고검 영장심의위원회의 권고로 뒤늦게 청구된 구속영장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봐야죠. 그런데 법원이 이를 기각한거 잖아요. 혐의 성립에 다툼의 여지가 있고,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도 없다는게 그 이유입니다. BBS에서 10년 가까이 법조 취재를 담당했던 전직 언론인으로서 전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아래 신문 사설이 바로 제 생각이예요."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않고도 컴백한 한덕수
"예상은 했지만 한덕수 대행의 컴백은 허탈하네요. 특히 더 허탈한 것은 '한 대행이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3명 가운데 1명도 임명하지 않았음에도 파면을 당할 정도로 중대하지 않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입니다. 결국 최상목 전 대행의 입장도 보호받게됐고, 복귀한 한덕수 대행이 마은혁 후보자를 임명할 가능성은 극히 낮아진 셈이지요. 남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전망을 어둡게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더 커지네요."

역사의 교훈은 희망을 잃지말아야한다는 것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을사늑약 120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인데요. 역사의 교훈을 잊지말아야합니다. 불굴의 의지로 독립을 쟁취해낸, 독재를 무너트린 우리 민족입니다. 위헌 위법한 비상계엄, 내란을 저지시킨 우리 시민들입니다.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그 희망을 절대 버리지맙시다!!!"
아래 글에는 제가 언론인 재직 시절, 역사의 교훈이 담긴 잠두봉을 지나며 느낀 소회가 담겨있어요. 『아침저널, 박경수입니다』 (p175~p178)

[김훈 선생과 잠두봉(蠶頭峯)의 눈물] (2017.10.17. BBS 칼럼)
유난히도 높은 하늘이다. 눈이 시릴만큼 깊고 푸르다. 조금은 서늘한 강바람이 금새 시원해진다. 때늦은 수상 스키에 밤섬이 그 곁을 내준다. 강변에서 걷고 뛰는 이웃들 모습에서 여유와 힘이 느껴진다. 차창에 스치는 한강도 좋지만 그 굴곡을 천천히 훑어가며 감상하는 파노라마는 절경 그 자체였다. 나는 이렇게 지난 주말 자전거로 한강변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서울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경관 한켠에는 역사의 아픔을 짙게 간직한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자전거를 세우고 그 현장을 찬찬히 둘러보는 동안 어느틈에 어둠이 밀려왔다. 손에 잡힐 듯 그리 멀지않은 150년전 어두운 우리 근대사(近代史)처럼 말이다.
마포대교 아래 강변에서 자전거로 10분 남짓 달리면 양화대교 밑을 지나게된다. 양화(楊花)라는 이름은 인근 강변에 갯버들이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양화진(楊花津)의 유래라고 할 수 있다. 그 바로 옆에는 툭 튀어나온 절벽이 보이는데, 누에고치의 대가리같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다. 한때 한강의 명소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거기서 수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절두산(截頭山)’으로 더 익숙해졌다. 김훈 선생의 소설 ‘흑산(黑山)’이 씌어지게된 계기가 바로 이 곳이다. 김 선생은 일산 집으로 귀가할 때면 절두산을 보고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썼다고 작품 후기에서 적고 있다.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는 당시 ‘사학(邪學)’으로 몰려 1만명 이상이 희생당했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도 용산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잠두봉에 조성된 추모비에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니 이번에는 저 멀리 강원도 홍천의 ‘자작고개’가 떠올랐다. 한강을 거슬러 다슬기가 많이 잡힌다는 홍천강 옆에 있는 고개다. 피가 자작자작 고여있다해서 붙여진 섬뜩한 지명이지만 그 유래를 알고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 역시 서울로 복귀하기 전 강원도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보며 그 나지막한 언덕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들을 떠올렸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 앞서 강원도 동학(東學)농민군 최후의 결전장이 바로 자작고개다. 1970년대에 와서야 도로를 만들며 숱한 유골이 발굴됐고 그제서야 후손인 주민들이 위령탑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음력 10월이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자작고개 인근에 꽤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강변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웠다. 자전거를 오른편에 끌며 천천히 걸었다. 강가를 비추는 가로등은 밝았지만 페달을 밟기에는 상념이 많았다. 동학(東學)과 서학(西學) 그리고 숱한 백성들의 희생. 김훈 선생이 잠두봉을 지나치며 느꼈던 압박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17년 10월1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