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강제 병합 100년을 앞두고
두달전쯤 한 조찬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연사는 중앙대 음대 노동은 교수였다. 간간히 피아노를 연주하며 들려주는 이야기가 퍽 흥미로웠다. 전날 과음에 술이 덜깬 상태였지만 뭔가 귀담아 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을 키운 테마였다. 초등학교 음악의 대표격이었던 ‘학교종이 땡땡땡’이 일본의 곡조였다는 설명이며, ‘쎄쎄쎄 아침바람 찬바람에’로 시작되는 동요가 사실은 일본의 유명한 동요라는 지적이며,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씨의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까지, 우리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 뿌리깊은 왜색음악에 대한 성토였다.
이같은 논란은 여간해서 잦아들지않는다. 분야별 시기별로 정도를 달리하고 있을 뿐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과거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해방직후 일제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데 논란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반민특위의 해체를 비통해하는 역사가들이 적지않다. 6월 6일을 ‘현충일’이 아니라 ‘반민특위 해체의 날’로 기억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독일 나치에 의해 세워진 프랑스 비씨정권의 최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한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과거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치않다. 어쩔 수 없는 친일은 이해줘야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를 받은 만큼 프랑스와 같은 역사적 단죄가 어려웠다는 분석도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친일 여부를 들먹이는 것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비난도 있고, 좀 더 나아가 ‘친북인물사전’을 만들어야한다는 어색한 주장까지 나온다.
친일 논란은 독재 부역 논란과도 유사하다. 정통성이 결여된 독재정권에서 일한 전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국무총리를 지낸 분도 이 논란에서 자유롭지못했다. 인사청문회 당시 야당 의원들의 날선 질문이 기억난다. 그럼에도 총리직을 꽤나 오래 유지했다. 독재 부역 논란은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는 듯하다. 현재 유력한 모 대선후보를 봐도 그렇고...
하지만 친일 논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파문이 그 논란의 파괴력을 웅변한다. 음악분야만 보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봉선화’의 홍난파, 대중음악인 박시춘, 반야월. 낯익고 존경받아온 분들이 ‘친일 인물’로 등재되면서 논란과 혼란이 커지고 있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혹자는 남북문제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남북분단이 불완전한 해방에서 비롯된 만큼 분단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친일논란이 늘 좌우 이념공방으로 이어졌던 선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얼마전 일본을 잘아는 한 지인이 “한일 관계가 언제까지 이래야하느냐”고 항변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아직 우리 내부의 논란도 마무리되지않았는데, 어찌 국가간 관계를 논할 수 있겠냐”고 답했었다. 한일병합 100년을 앞둔 지금, 깊어가는 세모(歲暮)의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다./(12/24(목) PAN PAN news 게재)